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키타 나오이에 (문단 편집) == 생애 == 1529년 우키타 오키이에(興家)의 아들로 태어났다. [[1534년]] 조부 요시이에(能家, ? ~ 1534)가 시마무라 모리자네(島村盛實, 1509 ~ 1562) 등에 의해 암살당해 아버지와 함께 도주하였다. 성인이 된 후에는 우라가미 무네카게(浦上宗景, ? ~ ?)를 섬겼다. 나오이에는 책모에 뛰어나 우라가미 씨의 세력확대 와중에 자신의 영지를 차곡차곡 넓혀갔다. [[1569년]] 결국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아카마쓰 마사히데(赤松政秀, 1510 ~ 1570)와 결탁하여 주군인 우라가미 무네카게에게 반기를 든다. 하지만 아카마쓰의 패배와 오다의 회군으로 무네카게에게 항복하여 용서를 빌게 된다. 이후 모리(毛利) 가문과 손을 잡고, [[1574년]]에 무네카게의 어린 조카손자인 히사마쓰마루(久松丸)를 옹립하여 다시 반기를 들었다. 다양한 모략으로 무네카게를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결국 비젠 국을 손에 넣었다. 필요가 없어진 히사마쓰마루는 [[독살]]되었다. 이후 우라가미 잔당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힘을 쏟는다. [[오다 노부나가]]의 명을 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가 진격해오자, 나오이에는 저항 끝에 노부나가에 복종하게 되었다. 이후 각지를 전전하며 모리씨와 전투를 되풀이했다. [[1581년]] 12월에 오카야마 성에서 사망한다. 이때 그의 나이 53세였다. 사인은 출혈성의 항문질환으로 대장암아니면 [[치질]]이었던 것 같다. 평생 말안장 위에 있다 보니 [[항문]]이 남아나질 않았겠지만, 효웅의 말로로서는 뭔가 웃프다. 후사는 어린 아들 [[우키타 히데이에]]가 이었다. 사실 이 과정에서 생애 마지막 모략을 사용한다. 당시 아들은 너무 어렸고 자신은 여러 과정에서 적을 영 많이 만든지라 가문이 망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기 후사의 후견인이 될 만한 인물을 고민한 끝에 [[하시바 히데요시]]를 불러들여 그에게 아내와 아들의 후견을 부탁하고 죽는다. 하시바 히데요시는 이걸 받아들였는데... 그 방법이 과부가 된 나오이에의 아내를 자기 첩으로 삼고 히데이에를 자기 양자로 들인 것이었다. 그래도 히데이에는 어떻게든 살아남아 지방에서 후손을 현재까지 이어나가고 있으니 자기 바람은 어느 정도 이루어진 셈. 마지막까지 영악한 효웅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